2021년 중반에 적어둔 메모를 거의 그대로 옮긴 글이다.

자각 없이 시작했다

작년 여름, 주말마다 모여서 서비스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때는 CTO라는 단어를 떠올린 적이 없었다. 그냥 내가 웹사이트를 만들 줄 아니까 만들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평일에는 회사에서 시키는 걸 하고 테스트 넘기고 퇴근 시간을 기다렸는데, 주말에는 기획부터 같이 하는 게 재미있어서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같은 개발인데 왜 이렇게 다르지 싶었다.

DB를 뭘 쓸지, 클라우드를 뭘 쓸지 처음부터 다 골라야 했다. 안 해본 것투성이였는데 별로 두렵지는 않았다. 웹사이트 만드는 건 자신 있었으니까. 지금 와서 보면 그건 자신감이라기보다 뭘 모르는지를 모르는 상태에 가까웠던 것 같다.

올해 3월에 정식으로 합류하면서 CTO라는 타이틀이 붙었다. 타이틀이 생겼다고 갑자기 뭐가 달라지지는 않았다. 여전히 코드를 쓰고,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쓴다.

소개하는 게 부끄럽다

요즘 제일 걸리는 게 이거다.

어디 가서 CTO라고 소개하는 게 부끄럽다. 아직 자리 잡지도 못한 회사에서 CTO란 사실상 모든 걸 혼자 하는 1인 개발자에 가깝다고 느끼는데, 타이틀만 거창한 것 같다. 그냥 개발자라고 소개하고 싶다. 겸손이라고 스스로 포장하고 있지만 정말 겸손인지는 잘 모르겠다.

며칠 전에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이게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

내가 우리 팀을 대표해서 나간 자리에서 민망해하고 움츠러들면, 상대는 그걸 나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우리 팀과 회사에 대한 인상으로 가져갈 것이다. 내가 우리 팀을 자신 없어 하는 사람으로 보이면 곤란하다. 그건 내가 감당할 문제지 팀이 감당할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일단 그러지 않기로 했다. 타이틀이 어떻든 지금 이 자리에서 해야 할 몫이 있는 거고, 그걸 잘하고 있는지는 자리 밖에서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대단한 결심이라기보다 더 이상 이 문제로 에너지를 쓰지 않기로 한 것에 가깝다.

면접에서도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리드 개발자로 들어갈 때와 CTO로 들어갈 때는 지원자들의 반응도 내 마음가짐도 달랐다. 회사가 기술 조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신호로 읽히는 듯하다.

그래서 나는 뭘 해야 하나

여전히 안 풀리는 게 있다.

기술적으로 어떤 스페셜티를 가져가야 하는가. 백엔드도 해야 하고, 인프라도 봐야 하고, 데이터도 붙어야 한다. 어느 하나를 깊게 파고 싶은데 그럴 시간이 안 난다. 그렇다고 넓게만 훑으면 나중에 남는 게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지금은 일단 내가 책임지는 서비스는 다 알고 있어야 한다는 쪽으로 생각하고 있다. 모르는 채로 결정을 내리는 게 제일 무섭기 때문이다. 이게 맞는 방향인지는 모르겠고, 아마 몇 년 지나야 알 것 같다.

그리고 하나 더. 지금은 내가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팀이 커지면 이대로는 안 될 것이다. 그때 나는 어떤 역할이어야 하는지가 아직 안 그려진다. 관리만 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계속 혼자 다 짜고 있을 수도 없다.

답이 없어서 일단 적어만 둔다.


덧붙임

한참 뒤에 다시 읽어보니, 이 고민은 답을 찾아서가 아니라 질문이 쓸모없어져서 끝났다.

팀이 여러 명이 된 뒤에도 내 업무에서 개발이 차지하는 총량은 거의 줄지 않았다. 팀 운영에 쓰는 시간이 늘어난 만큼 하루가 길어졌을 뿐이고, 남는 시간에는 여전히 코드를 본다. 어떤 날은 온종일 코드만 보고 어떤 날은 한 줄도 안 본다.

작은 조직에서 그 구분은 실질적인 의미가 없었다. 나를 필요로 하는 일을 하고 내 눈에 보이는 문제를 내 문제처럼 해결하다 보면, 그날 내가 뭐였는지는 나중에도 잘 모른다. 타이틀에 취할 일도 아니고 위축될 일도 아니었다는 게 지금의 결론이다.

스페셜티 문제는 아직도 답을 못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