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말에 생각이 하나 정리됐다. 오래 미뤄둔 문제였다.

안 하고 있었다는 자각

우리는 데이터를 다루는 회사다. 기업, 입찰, 공사, 현장, 뉴스 같은 것들을 모아서 구조화하고 연결한다. 규모로 보면 적지 않고, 실시간으로 도는 파이프라인도 이미 몇 년째 돌고 있다.

그런데 AI는 거의 안 하고 있었다.

이유를 대라면 얼마든지 댈 수 있었다. 인력이 없다, 지금 급한 게 있다, 우리 데이터에 그게 필요한 단계가 아니다. 실제로 그렇게 말해왔던 것 같다.

올해 그 설명이 더는 안 통한다고 느꼈다. 빅데이터를 다룬다면서 AI는 안 한다고 말하는 건, 이제 방향의 선택이 아니라 못 하고 있다는 것의 다른 표현에 가깝다. 그리고 도구가 이 정도로 갖춰진 상황에서 인력이 없다는 건 사실 핑계다. 골라 쓰기만 하면 되도록 다 만들어져 있다.

그래서 뭐라도 시작하기로 했다.

배우는 과정에서 좋았던 것

하반기에 AI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클라우드 쪽 엔지니어와 계속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제일 좋았던 건 말도 안 되는 걸 가져가도 됐다는 점이다. 내가 어설프게 그린 에이전트 구성도를 들고 가면, 웃으면서 어디까지 가능하고 어디서 막히는지를 정확하게 짚어줬다. 안 된다고만 하지도 않고, 다 된다고도 하지 않았다.

혼자 자료만 봤으면 훨씬 오래 걸렸을 것이다. 자료는 되는 것만 설명하지 안 되는 걸 설명하지 않는다. 한계를 아는 사람에게 직접 듣는 게 이렇게 빠른 일인지 오랜만에 다시 느꼈다.

이 감각이 낯설지 않았다. 몇 년 전 서비스를 처음 구축하면서 모르는 걸 매일 물어보고 다니던 시기와 거의 똑같았다. 그때처럼 흡수되는 게 느껴지고, 솔직히 재미있다.

신기한 것과 쓸 수 있는 것

한편으로 스스로 경계하는 부분도 있다.

모델이 내 말에 그럴듯하게 답하는 것만으로도 아직 신기하다. 그런데 신기한 것과 제품이 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라는 걸 자꾸 되뇐다. 데모는 잘 되는데 실제 데이터에 붙이면 안 되는 경우를 이미 몇 번 봤다.

특히 우리 도메인은 틀린 답을 그럴듯하게 내놓으면 안 되는 쪽이다. 어떤 기업의 실적이나 어떤 공사의 조건을 잘못 말하면 그건 그냥 오류가 아니라 판단을 망치는 정보가 된다. 그래서 무엇을 맡기고 무엇을 안 맡길지, 어디서 검증할지가 기술을 고르는 것보다 먼저다.

이미 갖고 있던 것

생각을 정리하다 하나 깨달은 게 있다.

우리는 이미 실시간 파이프라인을 갖고 있다. 데이터를 수집하고 정제하고 연결하는 구조를 몇 년에 걸쳐 만들어뒀다. AI를 하려면 그 앞단이 제일 어려운 부분인데, 우리는 그걸 이미 지나온 상태다.

그동안 나는 AI를 “우리가 아직 못 한 것"으로만 봤는데, 관점을 바꾸면 우리가 가진 것 위에 얹을 수 있는 것이었다. 없는 걸 세는 대신 있는 걸 세어보니 할 수 있는 게 꽤 많았다.

내년에 대해

방향은 정해진 것 같다. 데이터를 보여주는 것에서 판단을 돕는 것으로 가야 하고, 거기에 AI가 들어간다.

다만 순서는 조심하려고 한다. 화려한 걸 먼저 만들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그건 대체로 오래 못 간다. 검증할 수 있는 작은 것부터 붙이고, 그게 실제로 쓰이는지 보고, 아니면 접는 식으로 가는 게 맞을 것이다.

늦게 시작한 건 맞다. 그래도 지금 시작하는 것과 내년에 시작하는 건 또 다르니까, 이 정도에서 정리하고 넘어가려고 한다.